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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경기 노동자 건강권 쟁취 기획교육 2강 자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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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건강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건강권’이라는 말은 생소한 표현이었다. 어째서 건강권이란 말을 흔히 쓰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니, 환경오염이나 농축수산물 개방으로 식품 안전에 적신호가 켜지는 사건들이 요즘 들어 부쩍 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던 까닭은 정부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각계 인사들을 불러모아 소고기를 시식하는 쇼까지 보여주면서, 안심하라고, 믿어달라고 호소도 해보고,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될 것 아니냐고 을러대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 누구에게나 먹을지 말지 선택할 자유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먹느냐 마느냐의 자유에 대해서가 아니라 ‘국민 건강권’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의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단 한사람이라도 안전하지 않은 식품을 먹지 않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라는 얘기였다.


최근 먹을 거리 문제를 통해 건강권이라는 말도 많이 쓰게 되었고, 정부와 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도 많이 상승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의 책임을 요구하기 보다는, 더 안전한 식품을 찾아서 사 먹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현실이다. 안전한 식품을 먹을 권리조차 정확한 정보를 얻고 높은 가격을 부담할 수 있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내던져지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 건강권의 현실은 어떨까.

1. 노동자 건강권 현실 들여다보기


산재보험 통계를 보면 2008년 한해동안 하루 평균 6.6명이 노동재해로 사망하고, 하루 262명이 부상이나 질병의 재해를 당했다. 이 중 90% 가량은 사고성 재해로, 기본적인 안전조치만 잘 갖추어졌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들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는 당연히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일터에는 노동자 스스로 조심하라는 경고만이 가득하며,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작업자의 안전불감증’을 탓하곤 한다. 이런 노동자 건강권 현실을 교통안전 캠페인과 비교해보자.


“피곤하면 쉬었다가 운전하세요”


교통안전 캠페인에서는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자주 휴게소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정 졸리면 잠깐 눈을 붙였다가 운전을 하라고 한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피로가 쌓이지 않도록 더 많이 쉬어야 안전하다. 더 자주 쉴 수 있고 졸리면 아예 잠깐이라도 잘 수 있어야 한다. 졸지 말라고 얘기하는 건 옳지 않아!


“서두르지 마세요”


운전자들에게 마음이 급하면 사고가 나기 쉬우니 갈 길이 멀수록 시간을 넉넉히 잡고 천천히 가라고 한다. 일터에서 발생하는 사고들 역시 마찬가지다. 납품 기한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이만큼은 오늘 안에 꼭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때 사고가 나기 쉽다. 그러나 과속이 교통사고의 주 원인이듯, 일을 서두르는 것도 사고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야간운전은 피하세요”


밤이 되면 신체 기능이 떨어지게 마련이고 게다가 도로 환경도 낮보다 훨씬 위험하다. 따라서 야간, 특히 새벽 1시에서 5시 사이에는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도록 권한다. 수많은 현장에서 야간 교대작업이나 철야 근무를 당연스레 해오고 있지만, 사실 야간 작업은 안전의 기본에 어긋난다.


피곤하면 쉬었다가 일하기,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일하기, 밤에는 일하지 않기. 그럴 수 있는 노동조건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사업주와 정부의 책임이다. 그러나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책임, 즉 안전 보호 시설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할 책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피곤해도 참아라, 졸지 말아라, 빨리빨리 일해라, 야간 수당 없으면 뭐 먹고 살래, 이런 말들로 안전할 권리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우리 일터의 현실이다.


“기본적인 안전 조치”


도로에는 신호등, 차선, 표지판, 횡단보도, 인도와 차도의 구분 등 사고 발생 위험을 줄이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들이 있다. 각별히 사고 예방에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은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설정하거나 사고다발지역임을 경고하는 표지를 세우거나 중앙분리대를 보강하여 설치한다. 도로 보수 작업을 해야 하거나 교통량이 많은 경우에는 신호등이 정상 작동을 하더라도 안전요원이나 교통경찰이 따로 출동하여 차량 흐름을 관리한다. 일터에 이런 기본 조치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작업자가 알아서 조심하라고 당부하기만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규제와 단속”


또 하나의 안전조치는 규제와 단속이다. 교통법규가 있더라도 이를 준수하지 않는 경우를 규제하고, 그런 규제 때문에라도 더욱 안전조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다. 한국은 사업주에 대한 산업안전보건 규제와 처벌이 솜방망이, 아니 솜털 수준이다. 가령 2009년 초 미국에서는 밀폐 공간 질식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한 기업에 50만 달러(원화 6억 8천만원 상당)의 벌금을 부과했고, 영국 산업안전보건청(HSE)이 2004~2005년간 기소한 사건들 중 95%가 법원에서 유죄로 판결되어 평균 벌금이 18,765 파운드(원화 약 3천6백만원)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같은 사망재해에서 사업주들이 무는 벌금은 고작 300만원을 넘지 않는다.


“사고가 나도 덜 다치는”


교통안전 조치의 또다른 요소는 만에 하나 사고가 나더라도 부상과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들이다. 안전벨트, 에어백 등이 바로 그런 장치에 속한다. 비행기를 타면 아무리 짧은 거리를 가더라도 늘 몇 분의 시간을 들여서 안전벨트, 산소마스크, 안전조끼 사용법과 비상구 대피방법을 안내한다. 사고가 나지 않는 한 불편하기만 하고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지만, 말 그대로 “만에 하나”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하여 규격과 품질 요건을 엄격히 적용하여 관리하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교육을 하는 것이다.


일터에서 사용되는 안전시설이나 안전보호구, 안전보건교육도 바로 이래야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규제를 완화한답시고 안전시설과 장비에 대한 점검과 규제를 기업 자율에 맡겨버렸고, 안전보건교육 또한 이름만 남은 것이 일터의 현실이다.

그래 놓고도 정부는 산재 발생률이 줄었네 마네 떠든다. 실제로 산재보험이 도입된 1963년부터 지금까지의 통계를 보면 산재 발생률이나 사망률은 줄어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법을 바꾸거나 정부와 기업들의 노력이 특별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다. 오히려 전체적인 추세를 보면 1970년대에는 광업의 비율이 줄어들고 산재보험 적용 범위가 점차 확대되면서 사망률과 재해율이 희석된 것이며, 1980년대 후반에 전국민 의료보험이 적용되면서 가벼운 질병과 부상 환자들이 산재보험 진입 장벽을 넘지 못하고 의료보험 환자로 옮겨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게다가 산재 사망률만으로 놓고 보면 1990년대 이후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 인구 사망률의 변화와 함께 비교하면 노동자들의 생명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위험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이 도입된 후 강산이 세 번 바뀌었는데도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면, 법과 제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지.




2. 노동자 건강권은 아~주 넓은 의미랍니다


‘건강권’ 안에는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멜라민, 조류 독감, 광우병, 돼지 바이러스를 걱정하지 않고 안전한 식품을 먹을 권리. 석면이 들어가지 않은 안전한 ‘베이비 파우더’를 아이의 엉덩이에 발라줄 권리.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살아갈 권리. 어디를 다니든지 사고 걱정없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동할 권리. 돈이 없어도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


노동자 건강권에도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흔히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일할 권리’라고 얘기하지만, 죽음과 사고와 질병 없이 일할 ‘방어적인’ 권리는 노동자 건강권의 일부일 뿐이다.


노동자 건강권이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도 포괄적인 권리다. 어린이에게는 과자를 먹고 독극물에 중독되지 않을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성장에 필요한 영양과 교육을 부족함 없이 누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세계보건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에서는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온전히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을 노동자 건강권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풀어본다면 “노동자 건강권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온전히 행복한 상태를 누릴 권리”라고도 할 수 있다.

☞ 육체적 건강권 : 다치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고 일할 권리

☞ 정신적 건강권 : 정신적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요인들에 대해 자주적, 민주적으로 통제할 권리

☞ 사회적 건강권 : 사회구성원 모두가 골고루 누려야 할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의료 등 모든 사회적 권리를 함께 누릴 권리

☞ 영적 건강권 : 사상, 종교,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말하고 행동하며 조직할 권리



기존의 산업안전보건 제도와 원칙들도 노동자 건강권의 시각에서 재해석해보면 참 새롭다. 예를 들어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에서 만든 “산업보건서비스의 원칙” 다섯 가지를 재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보호와 예방의 원칙 : 작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해요인으로부터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한다.


☞ 보호와 예방의 권리 : 노동자는 작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해요인으로부터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2. 적응의 원칙 : 노동자의 능력에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을 맞춘다.


☞ 적응의 권리 : 주어진 일에 자신을 맞추도록 강요받거나 그럴 수 없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상태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을 바꾸어낼 권리가 있다.

3. 건강증진의 원칙 : 노동자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을 확대한다.


☞ 건강증진의 권리 : 노동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건강을 훼손받지 않고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동환경을 바꿀 권리가 있다.


4. 치료와 재활의 원칙 : 산업유해요인, 사고와 상해 및 직업성 또는 직업관련성 질환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최소화한다.


☞ 치료와 재활의 권리 : 유해요인 및 노동재해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제대로 된 치료와 재활을 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


5. 일반적인 일차보건의료 원칙 :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작업장이나 가까운 보건시설에서 일반적인 보건의료서비스(치료와 예방 서비스)를 제공한다.


☞ 일반적인 일차보건의료의 권리 :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작업장이나 가까운 보건시설에서 일반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다.

[참고] “적응의 권리”와 관련한 읽을 거리

 

적응하지 말자

 

금속 제조업 공장을 둘러보면 어디나 비슷한 모습이다. 가공부서에 가면 위잉~위잉~ 금속을 돌로 갈아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공장 바닥은 절삭유가 튀어 미끄럽고 기계며 벽이며 공기 속에 흩날리는 작은 기름방울들이 내려앉아 기름때가 꺼멓다.

 

그 옆의 도장부서에 가면 취익~취익~ 분사기를 쥐고 페인트를 뿌릴 때마다 눈 앞이 흐려진다. 십 킬로그램을 훨씬 넘는 제품을 번쩍번쩍 들어올리기도 하고, 작은 망치를 들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내려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너무 시끄럽네요’ ‘바닥이 미끄러워서 넘어질까봐 걱정됩니다’ ‘페인트가 너무 심하게 날리네요’ ‘몸에 무리가 갈 것 같아요’라고 얘기하면 되돌아오는 답은 십중팔구 똑같다. ‘저희는 적응이 돼서 괜찮아요.’

 

적응의 결과는 무얼까. 소음에 적응하다보면 소음성 난청으로 청각 장애인이 된다. 별다른 환기장치도 없이 눈코입으로 유기용제를 들이마시면서 일하는 데 적응하다보면 유기용제 중독으로 병을 얻는다. 사고 위험이 가득한 현장에 적응하면서 일하다가 떨어지고 넘어져서 다친다. 스트레스와 눈칫밥이야 다들 적응하면서 사는 거라 위안하다가 과로사로 죽고, 십년 넘게 적응해온 그 일 때문에 골병이 든다.

 

무릇 일터는 사람이 일할 만 해야 하고, 사람이 살만 해야 한다. 마음껏 숨쉬고 마음껏 얘기하고 마음껏 일할 만 하지 않다면, 적응하지 말자. 적응의 댓가로 내 생명과 건강을 치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3. 노동자 건강권, 더 넓게~


이것만이 아니다. 노동자 건강권은 인간답게 일할 권리인 동시에 일하지 않을 권리이기도 하다. 앞에서 강조한  ‘적응의 원칙’을 또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보면, 적절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프면 일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 더울 때나 너무 졸릴 때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일하지 않을 권리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제대로 쉴 권리도 건강권에 포함된다.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바보가 된다’는 서양 속담도 있지만, ‘제대로 쉬지 않으면 병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분한 양과 높은 질의 휴식을 취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권리다. 노동자 건강권은 제대로 쉴 권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끝으로, 건강권은 ‘전체 노동자’가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한 개인, 한 사업장, 한쪽의 성별이나 한 쪽의 지역, 인종, 국가에만 보장되는 권리란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위험하고 유해한 산업의 환경오염과 노동보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단지 소위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더럽고 위험한 작업환경이 개선되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소규모 외주하청 노동자에게, 이주 노동자에게 옮겨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노동자 스스로 보편적인 권리로 나아가기 위한 골치 아프고 피곤한 길을 피해 가거나, 보고도 못본 척 하는 일도 있다. 노동자 건강권은 계급 전체의 보편적인 권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4.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첫 걸음


정작 노동자 건강권에 관련된 법과 제도에서 보장하고 있는 권리는 알 권리, 참여할 권리, 위험한 작업에 대한 회피권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노동조합이 없거나 유명무실한 ‘근로자 대표’를 둔 노동자들은 아예 근본적으로 권리를 누릴 수 없고, 이주 노동자나 불안정 노동자들의 특별한 상황과 필요를 고려한 권리 보장은 전무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역시, 건강할 권리를 이미 잃은 노동재해 피해자들에게 치료와 재활,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민간 보험과 다를 바 없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짜여있다. 현장에는 안전제일 표지판이 난무하지만, 정작 일터에서 제일인 것은 안전이 아니라 이윤, 품질, 고객이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 건강권을 향한 실천의 목표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1. 잣대 바로 세우기


이윤보다 생명을!  이윤보다 건강을!  이윤보다 인간을!  이윤보다 노동자의 몸과 삶을! 등의 구호들을 들여다 보자. 단순히 “생명은 소중한 것”“건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중심” “삶을 위하여” 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명확하고 적극적이다. 여기에는 생명, 건강, 인간, 몸과 삶이 이윤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가치 선언이 들어있고, 이렇게 선언해야만 하는 현실, 즉 실제로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기본 관점과 잣대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노동자 건강권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는 건강이 ‘노동자의 권리’이며, 그 무엇으로도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2. 일상에서 주체 되기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만들려는 노력은 가끔 노동자 내부에서 좌절을 겪기도 한다. “에이 그게 진짜 되겠어?” “그러다 회사 망하는 거 아니야?” “그나마 우린 나은 편이잖아” “회사가(노조가) 알아서 해주겠지” “이 정도면 견딜 만 하잖아” “나이도 젊은게 엄살은~” “너 정도면 양호하지 누군 안아프냐” “일손도 바쁜데 대충 치료하고 빨리와” 등등.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은 종종 ‘조합원들의 인식이 부족해서’라고 탓한다. 하지만 인식이 부족한 까닭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히 인식이 부족하다는 탓만 하다가 세월만 흐르고 만다. 인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건강할 권리를 제일의 잣대로 여기지 않아온 경험, 권리 주체가 아니라 생산수단이며 관리대상으로 살아온 경험이 바뀌어야 인식을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소위 산업안전보건제도/관리/경영에서 노동자는 관리의 대상이나 수혜 대상자로만 자리매김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건강권의 권리 주체로 살아본 적이 없다. 따라서 현장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일상적인 노동자 건강권의 권리 주체로 서는 경험을 만들도록 애써야 한다. 자신의 권리 인식을 법이나 기성 질서의 테두리에 가두지 않고, 일상에서 노동자 건강권을 풍부하게 만들어나가는 주체가 되는 다수가 되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다.


건강권 투쟁의 “지향”은 모든 노동자들이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일상적인 권한과 권력을 누리는 것

건강권 투쟁의 “실천”은 모든 노동자들의 일상 현장 통제권을 되찾고 새로 세우기 위한 시도와 훈련

[참고] “노동자 건강권의 보편성”과 관련한 읽을 거리

 

직업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옮겨질 뿐

 

1. '앉은뱅이병'은 30년 전에도 있었다

 

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직업병에 걸리는 "○○노동자 ○○사건"들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멀리 1950년대의 탄광 노동자 진폐증부터 1988년 故문송면 군의 수은중독과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 중독, 1995년 LG전자부품 여성노동자 2-브로모프로판 중독에 의한 불임, 그리고 2002년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집단요양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여러 현장에서의 근골격계 직업병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타이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앉은뱅이병'. 사실은 전혀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직업병이다. 노말 헥산으로 인한 다발성 신경염은 미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찍이 1930년대부터 유명한 직업병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30년 전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1974년 신발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바로 이 노말 헥산에 의한 다발성 신경염으로 진단받아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공업용 세척제나 접착제를 사용하는 노동자들은 노말 헥산 중독의 위험이 크며, 사업주는 중독 예방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는 수십년 전부터 알려진 산업보건·산업위생 영역의 상식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번 사건처럼 그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2. 줄지 않는 노동재해

 

그래서인지 노동재해(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의 발생 규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노동재해율은 1960년대 이래 조금씩 감소해왔지만, 1998년 이후 다시 증가하고 있다. 노동재해로 인한 사망률도 꾸준히 증가하다가 199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도 한해에 약 3천명이 노동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는 형편이다.

 

노동재해의 규모만큼이나 그 내용과 질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노동환경의 변화로 인해 업무상 사고에 비해 업무상 질병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는 있으나, 아직도 전체 재해 중 90% 이상은 사고로 인한 것이다. 특히 전체의 70% 이상은 협착·추락·낙하 등 재래형 사고가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안전과 재해 예방을 위한 사업주의 의무가 방기되고 있기 때문인 동시에, 인력 감축·작업량 증가·다기능화 등을 통하여 노동자가 안전을 생각할 여지조차 없이 일해야 할 만큼 현장의 노동강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3. 직업병은 사라지지 않고, 옮겨지고 있다

 

물론 노동안전보건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업복과 안전모, 안전화, 장갑 등 개인 보호구의 성능은 나날이 고급화되고 사업장 보건진단 시스템이나 안전보건교육도 다각화되어왔다. 보다 적극적으로 환기시설이나 공정 개조 등 작업 환경을 개선한 사업장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노동재해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좀더 취약한 노동자에게 옮겨질 뿐이다. 직업병이나 사고가 많이 생겼던 위험 작업은 외부 하청업체나 사내하청·임시계약직 노동자, 그도 아니면 연수생의 이름으로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의 몫으로 전가된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비정규직·이주노동자들은 재해와 직업병이 빈발하는 고위험 작업에 종사하도록 강요받고있다.

 

그렇다고 각종 안전보건체계의 혜택을 누리는, 일부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안전하지 않다. 이들에게는 지속적인 구조조정 속에서 고용불안과 노동강도 강화라는 새로운 위험이 닥쳐왔다. 아무리 성능 좋은 보호구나 최신식의 환기시설도 노동강도 강화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해줄 수는 없었다. 그 결과는 근골격계 질환·뇌심혈관계 질환 등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사망의 가파른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의 위험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 또다시 새로운 위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4. 위험도 수출하는 세계화

 

고위험 작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자본의 시도는 국제적인 수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유해산업의 수출(Export of Hazard)'이라고 부른다. 유해산업의 수출은 세계화의 또다른 이름이다. 자본은 공장 하나를 구조조정할 때 유해공정을 가장 먼저 아웃소싱하듯, 전 산업에 걸친 구조조정을 기획할 때도 유해산업을 최우선으로 배치해온 것이다.

 

가령 미국은 1998년 필리핀과 콜롬비아에 투자한 총 금액 중 무려 41%와 22%를 유해산업에 쏟아부었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도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이른바 제3세계 국가들로 공장을 이전해두었다. 북유럽 국가들의 재해율이 낮은 이유는 고위험 노동을 이주노동자에게 전가시키거나 아예 외국으로 내보내버려 자국 내에서 재해가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진레이온이 바로 이러한 과정을 고스란히 밟았다. 원진레이온 자본은 일찍이 미국·일본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기계를 고스란히 들여와 공장을 가동하였으며, 결국 6백여명의 직업병 환자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공장문을 닫았다. 그러나 1994년, 그 기계는 또다시 중국 단둥으로 팔려갔다.

 

5. 얻는 자와 잃는 자

 

자본의 입장에서는 조직된 노동자들의 문제제기와 저항이나 유해산업에 대한 정부의 까다로운 환경규제가 모두 각종 비용의 증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은 고위험 작업·유해산업을 공장 밖으로, 나라 밖으로 이전시킴으로써 보다 손쉽게 비용절감을 꾀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자본은 구조조정과 세계시장 침투를 별다른 저항없이, 심지어 적절한 명분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이득을 또 하나 챙긴다.

 

반면에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 결과는 참담하다. 미조직·비정규직·이주·후진국의 노동자는 기본적인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한 상태에 더하여 온갖 고위험 작업을 도맡게 된다. 고위험 작업을 벗어나게된 노동자들도 다를 바 없다. 몇 가지 유해물질들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대신 고용불안과 현장 통제권의 상실, 그리고 노동강도 강화라는 새로운 위험에 처하게 되며, 그 결과 근골격계 질환이나 과로사 등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6. 해결을 위하여

 

노말 헥산 같은 유기용제는 3만 가지가 넘는다.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은 유기용제 이외에도 수만가지의 화학물질들과 물리적 노동환경 및 온갖 생물학적 유해요인 등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이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현장의 일상 속으로 깊숙히 침투해 들어옴에 따라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고용불안, 고도의 노동강도가 노동자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고용허가제 또한 저비용·무권리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려는 신자유주의의 일면에 다름 아니다.

 

노말 헥산을 사용하지 않는 사업장도, 이주 노동자보다 나은 노동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 어느 곳에 있는 어느 노동자도 예외없이 위험한 현실, 이것이 바로 우리 일터의 현주소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은 피해 노동자에 대한 보상, 사업주 처벌, 노말 헥산에 대한 규제 강화,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등으로 종결될 수 없다. 70여년 전 미국에서 30년 전 한국으로, 그리고 또다시 지금 현재 한국 내의 이주 노동자들로 끊임없이 이전되어온 위험을 끊어낼 수 있는 실천을 시작해야 한다.

 

출처 :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통권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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